2022년 8월 29일 월요일

재와 환상의 그림갈 19권 12장

 0122A660 생존(Alive) 오르타나를 둘러싼 방벽은 3분의1내지 반쯤 붕괴되어 있었다. 단순히 무너진 장소가 있는가 하면, 파괴되어 낮게 무너져내린 곳이, 세카이슈가 지나다니는 길이 되어 있는 곳도 있다. 북문은 세카이슈 때문에 열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르타나 바로 남동쪽에 위치한 언덕은, 열리지 않는 탑과 함께 세카이슈 그 자체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그 일대의 세카이슈에게는 먼곳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 있었다. 눈에 띄게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세카이슈, 표면에 거품이 일어나고 있거나, 출렁출렁 파도가 치고 있는 세카이슈,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세카이슈보다 , 뚜렷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카이슈는 더 위험하다. 하루히로들은 언덕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북서쪽 방벽이 일부, 2미터 정도에 걸쳐 무너져 내려 있고, 그 주변에서는 세카이슈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곳으로 오르타나로 들어가보니, 북구와 서쪽거리 사이의 경계선 부근이었다. 북구의 서쪽부근은 원래 낡은 목조 건물이 많고, 서쪽 거리에는 폐가나 다름 없는 황량한 집들이 밀집해 있다. 거리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을 듯한 좁은 골목길이 심하게 뒤엉켜 있어서, 시야는 상당히 나쁘다. 하루히로들은 북구의 북서 가장자리 부근에 있는 루미아리스 신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루미아리스 신전은 고지대에 세워져 있으며, 오르타나 내에서 천망루 뒤를 이어 높이를 자랑하는 석조 건축물이다. 루미아리스 신전 앞에 서자, 오르타나의 전경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오르타나는 세카이슈에 잠식당해 있다. 특히 북구에서 남구에 걸쳐, 천망루 앞에 광장이나, 화원길, 세리 주점이 있었던 천공골목(天空横丁), 의용병단 사무소와 장인거리 부근에는, 여러 갈래의 시커먼 강이 흐르고 있다. 하기야, 생각했던 것 만큼 비참한 풍경은 아니다. 오르타나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새 한마리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거리에 공포를 흩뿌려, 파국을 초래했음에 틀림이 없는 세카이슈도, 지금은 활동적이지는 않은 듯 하다. 조용했다. 그저 오로지 조용히 썩어 가려 하고 있다. 언젠가 모든 것이 풍화되어, 흔적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이다. 오르타나는 마치 죽음의 거리 같았다.

하루히로들은 광명신 루미아리스의 거상이 안치되어 있는 3층예배당에서 한숨돌렸다. 광륜(光輪)을 짊어진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보여지는 신의 상(神像)은 그 높이가 10미터까지는 안되는 정도일까? 예배당 천장은 꽤 높다. 의자나 독서대도 벽가에 난잡하게 쌓여 있다. 파손된 것도 많다. 돌바닥은 군데군데 상처가 나거나 거무스럼하게 더럽혀져 있다. 넓이는 충분하다. 아니, 너무 넓다. 수백명이 새우잠을 잘 수 있을 넓이다. 

「여기 라면 말야, 불을 피워도 괜찮을 것 같지?」 「그카겠제」 「먹을 것, 아직 제로는 아니지만, 확보라든가 하지않음ー말야. 뭐, 찾아보면ー뭔가 발견되겠지」 란타와 유메는 바닥에 모피를 깔고, 그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란타는 천연덕스럽게 유메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다. 유메는 그냥 놔둔다. 이츠쿠시마는 포치와 함께 신상(神像)을 올려다 보고 있다.  하루히로는 좌우 손을 차례대로, 천천히 잡아봤다. 통증이라할 정도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위화감은 있다. 양쪽 손 모두 움직이기 힘들다. 아마 무의식 중에 동작을 제한하고 있을 것이다. 몸이 두려워 하고 있다. 두려워할 뭔가가 있단 말인가? 하루히로는 알 수 없다. 「거리를 둘러보고 올께」 「하루군 혼자서 갈라꼬?」 「나 혼자인 쪽이 좋아」 「……맞나」 「갔다올께」 「조심 하라꼬」 유메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돌아오라고」 란타는 퉁명스레 그말만 했다. 이츠쿠시마와 포치는 말없이 하루히로를 배웅했다. 하루히로는 신전을 뒤로 하고 서쪽거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쪽거리는 그늘진 거리다. 어느 길을 지나도 햇볕이 바로 내리쬐는 일은 거의 없다. 지면은 비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나 새나 짐승의 배설물에 젖어 항상 습하다. 불결해서 악취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잠시 있으면 익숙해져 버리지만, 오랫만에 오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코를 잡고 싶어진다. 그만큼 냄새났던 서쪽거리에서, 하루히로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평범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가끔 어둠속에서 유충 같은게 꿈틀거리고 있는 기색은 있어도, 쥐 한마리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떤 골목길로 나가자, 키 낮은 철문이 나타났다. 열쇠 구멍이 있는 손바닥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하루히로는 몸을 낮추고 문장에 오른손을 갖다댔다. 힘껏 힘을 주자, 오른 손목이 아팠다. 이렇게 문장부분을 밀어 넣으면, 안으로 신호가 전달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대로 한참 기다려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루히로는 철문을 등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경과한 후, 일어나서 다시 문의 문장을 밀어넣었다. 그것을 네번, 반복했다. 역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엘라이자씨」 하루히로는 불러보았다. 이 골목에서 나는 소리는  전성관(傳聲管)을 통해 안에서 들을 수 있다.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대답은 없다. 도적길드도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서쪽 거리를 떠나, 하루히로는 남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인거리의 중심지에는 여러개의 세카이슈가 얽히 듯 기어다니고 있었다. 이곳에는 의용병들이 자주 신세지는 대장간이 있었다. 직물 장인이 있었다. 석공이나 목수도 있었다. 장인들의 공방은 일제히 약탈당하거나 부숴 무너져 있어, 지난날을 회상하기조차 어렵다. 장인거리 근처에는 포장마차 마을이 있었다. 하루히로들도 자주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소르조라는 면요리는 내놓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조림고기가 들어간 짭짤한 국물에 누런면이 들어가 있다. 모구조가 좋아 했었다. 그 소르조 포장마차가 있었던 장소 근처에, 거무스럼한 세카이슈가 몸을 눕히고 있었다.  하루히로 의용병 숙소에 들렀다.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방을 둘러봐도, 스스로 신기해할 정도로 아무런 감개(感慨)가 솟아나지 않는다. 마나토나 모구조의 이름을 입밖으로 꺼내봐도, 가슴의 삐꺽거림조차 없다.  과거 숙소 현관에는 벽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확인했었던가? 하루히로는 그런 걸 생각해 봤다. 의용병 숙소에서 지낼 때, 이곳에 있던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 했었다. 「나, 어떻게 되어버린걸까?」 시간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마나토 때도, 모구조 때도, 그랬었지 않았던가? 당분간은 견딜 수 밖에 없다.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거의 똑같은, 어쩌면 완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 때는, ‘견딜 수 없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라고 느꼈었다. 그래서 ‘차라리,  끝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왠지 이제, 일부러 끝내는 것도 귀찮다. 지금, 하루히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흐름에 맡겨 내버려두고 있다. 어차피, 이든 저든 어떻게된 된다. 되는대로 되면 된다. 하루히로는 숙소를 나섰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북쪽으로 향해, 요로즈 위탁 상회가 있던 곳을 지나가게 되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없어졌어」 정확하게는 잔해의 산이 남아 있다. 그곳에는 바위를 고정시킨 듯 보여 견고한 구조의 창고가 있었다. 확실히, 진・모기스의 부하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창고의 내용물은 잘 모른다. 아마 위탁상회가 의용병들로부터 위탁받은 금품을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위탁상회. 요로즈. 그러고보니, 요로즈는 무사한걸까 타인의 안부가 머리에 떠오른 것은, 꽤 오랫만인 듯한 기분이 든다. 애초에, 왜 하루히로는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을까? 시노하라의 말을 듣고, 위탁상회의 모습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그일이 왠지 모르게 발길을 이곳으로 끌어당겼을 지 모른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모른다. 그냥, 뭔가 신경이 쓰인다. 「신경 쓰이는――건가?」 머리가 심히 무겁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다. 어떠한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으면 좋은데. 모든 일에 무관심 하다면, 이런식으로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짓눌려 답답하고, 온몸이 무겁고 나른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루히로는 하늘을 올려다 보려 했다. 얼굴을 위로 드는게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시선만 위로 향하게 한다. 하늘은 낮다. 시간인가? 시간이 필요한가? 앞으로 며칠? 몇개월? 일년? 2년인가? 좀 더? 하루히로는 걷기 시작했다. 자기자신을 가라앉혀 버린다. ――은형(STEALTH). 『죽어』 바르바라 선생님이 웃으며 말한다. 『죽는거야, 늙은고양이(OLD CAT) 은형은 크게 3가지 기법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잠(潜)――하이드(HIDE). 둘째, 존재를 지운 채 이동한다, 부(浮)――스윙(SWING). 셋째, 감각을 총동원해 다른 사람의 존재를 감지한다, 독(読)――센스(SENSE). 『시체가 되는거야』 그사람에게는 몹시 혼났다. 『못하겠으면, 내가 도와줄게』 손가락 뼈와 쇄골, 갈비뼈가 부러져 아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죽는 모습 보이지 마라 고 명령 받기도 했다. 지독한 사람 이었다. 도대체, 뭐냐고, 올드 캣이라니. 『너, 늙은 고양이 처럼 졸린 눈을 하고 있으니까』 바르바라 선생님은 몸이 산산조각 나 죽었다. 아니면, 살해당한 뒤 뿔뿔이 흩어진걸까? 오른팔, 왼팔, 오른다리, 왼다리가 각각 창으로 꿰어 있었다.  몸통은 두 세개로 나뉘어져, 창자가 흘러 나와 있었다.  발 근처에 바르바라 선생님의 시체가 굴러왔다. 머리뿐이었다. 오른쪽 눈이 감겨 있었다. 왼쪽 눈은 조금 떠져 있었지만, 당연히 어디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쪽 뺨은 돌바닥에 눌려 있었다. 얼굴 전체가 오른쪽으로 처져 있었다. 상처 투성이 였다. 피로 얼룩져 있었다.  생생하게 떠오른다. 괴롭지는 않다. 바르바라 선생님은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유해를 하루히로는 보았다. 그 사실이 사실로서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올드캣. 넌 말야. 시야가 넓고, 여간해서 동요하지 않아. 머리 회전은 보통이지만. 과신하지 않고, 무슨일이든 꾸준히 할 수 있는 끈질김이 있어』 하루히로는 불초 제자였다. 바르바라 선생님은 하루히로를 잘못 보고 있었다. 시야는 좁다. 여간해서 동요하지 않는 인간따위 아니다. 머리 회전은 보통보다 나쁘다. 과신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루히로에게는 끈질김 따위 없다. 『넌 하자면 바로 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야.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아이지. 그러니까, 지금,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건 상관없어. 넌 언젠가, 할 수 있게 되니까』 위로는 필요없다. 격려해줘도 분발할 게 없다. 바르바라 선생님은 죽었다. 죽은 사람은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는다. 격려 따윈 할 수 없다. 쿠자크도, 세토라도 죽었다. 죽었을텐데, 일어섰다. 메리가 한 일이다. 아니. 그건 메리가 아니다. 메리는 죽었다. 되살려 버렸다. 아니.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아니. 메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사의 왕. 『좋아해』 메리가 말했었다. 두사람은 서로 껴안고 있었다. 입을 맞추었다. 그것도 메리가 아니었다? 『하루. 당신이 좋아. 날 놓지말아줘』 놓지 말아줘. 분명히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게 메리가 아니었다? 정말 그런건가? 그건 메리의 의지와 생각이 아니다. 그녀가 아닌 것이 그녀의 몸을 빌려 말한 것 뿐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건가? 쿠자크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토라는? 불사의 왕 속에, 메리는 이미 없는건가? 두번 다시, 이야기 할 수 없는 건가? 『날 놓지말아줘』 하루히로는 이미 놓아 버린건가? 떠나 와 버렸다. 여기에 메리는 없다. 사실, 헤어졌다. 놓으면 안되는데. 놓기 싫었는데. 놓아버린 것이다.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도망쳐오지 않았다면 좋았다. 같이 있고 싶었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었어야 했다. 계속 곁에 있고 싶었다. 이미 늦었다. 늦었어? 정말로? 정말로, 결코, 다시는,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건가? 얼굴을 보는 건? 목소리를 듣는 건? 아직 메리는 어딘가에 있는게 아닐까? 불사의 왕 속에서, 메리는 울부짖고 있는 게 아닐까? (나를 놓지 말아줘) (나를 혼자 두지 말아줘) (하루) (나를 놓지 말아줘) 아니. 하루히로는 알 수 있다. 메리의 일이다. 지금 분명 이렇게 바라고 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나는 괜찮으니까) (잊길 바래) (나는 어디에도 없어.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치고) (이제, 나에게 다가오지마) 그렇기 때문에, 하루히로는 메리를 놓아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 메리가, 놓지 말아줘 라고 말했었다. 메리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 안에 터무니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그것으로 바뀌어 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메리는 갖고 있었을 것이다. 메리니까, 많은 고민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루히로를, 동료를 가까이 오게 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차라리 자취를 감추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신관이 없어지면 다들 곤란하다. 그럴 수는 없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될 수 없었을 지 모른다. 그 메리가 놓지 말아줘 라고 하루히로에게 매달릴 정도다.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돼? 뭘 할 수 있지? 어차피, 자신 따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을까? 메리에게 호소해, 나는 여기에 있어 라고 전한다 해도, 그 목소리가 닿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쿠자크나 세토라와 다시 만나봤자, 두 사람이 이전과는 다른 뭔가로 변해 있다면? 『……다행이다 』 느닷없이 다룽갈에서 시호루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하루히로군이……리더고. 동료라서. ……친구라서』 뭐가 다행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리더――인거야?』 가능하다면 그렇고 싶었다. 하루히로가 정말 최고의 리더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호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열리지 않는 탑에 있을까? 열리지 않는 탑은 언덕째 세카이슈에게 뒤덮여 있었다. 무사한 걸까? 어떻든, 시호루는 어차피 하루히로를 잊고 있다. 소중한 동료로, 친구였던 날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차라리 다행이지 않나? 잃어버려 깊게 상처받은 일도, 시호루는 망각한 것이다. 상처째 사라져 없어진 것이다. 이제 괜찮잖아. 괜찮은거야. 이제, 됐어. 진심으로 납득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되짚어 생각하거나 하지 않는다. 하루히로는 메리의 손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왜 놓거나 해버린걸까?  왜 놓는게 가능했단 말인가? 실수였다. 하루히로는 큰 실수를 범했다. 돌이킬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가는건 불가능하다. 실수를 메꾸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심하구나. 꼴불견이다. 산뜻함은 조각도 없다. 적어도 태도를 분명히 해. 앞으로 나아갈거면 나가. 멈출 거면 가만히 있어. 도망가고 싶으면 꼬리말고 도망가면 돼. 어떻게 하고 싶은건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런것 치고는 꾸물꾸물 거리고 있잖아? 누가 등이라도 밀어주길 바라는 거냐? 뒤를 받쳐주는 사람도 있겠지? 하나부터 열까지, 자질구레한 것까지 가르쳐 주길 바라는 거냐? 자,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지시받고 싶은 거야? 『넌 하자면 바로 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야――』 바르바라 선생님은 실로 잘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자면 바로 할 수 있다 는 생각따위 해 본 적이 있었을까? .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아이지』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없으니까, 될 때 까지 하는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암중모색(暗中模索)이다. (역자주 - [암중모색, 暗中模索] 어둠속에서 더듬어 찾음) 이츠쿠시마가 풍조황야의 참혹서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었다. 『나는, 살아있다구』 그는 하루히로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왔다. 숙련된 사냥꾼으로서,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져 왔을 것이다. 그런 남자의 실감이, 자신은 살아 있다, 단지 그것뿐이라는 것. 살아 있다. 지금도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그저, 살아 있다. 살고, 살고, 살아 있다. 「……나도, 살아 있어 」 미안한 감정을 느껴 버린다. 마나토. 모구조. 바르바라 선생님. 다시는 볼 수 없는 많은 사람들. 「나는 아직, 살아 있어」 하루히로는 천망루 앞 광장으로 향했다. 이 근처는 유난히 세카이슈가 많다. 거리 한가운데로 굵은 세카이슈 강이 버젓이 흐르기도 하고, 가장자리 쪽으로 몇 가닥의 가는 세카이슈 관이 기어다니기도 한다. 관 모양의 세카이슈가 거리를 가로 지르고 있기도 하다. 어느 거리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세카이슈를 볼 수 있다. 세카이슈는 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반대인걸까? 광장에서 오르타나 곳곳으로 거무스름한 촉수를 뻗고 있는 건가? 병사의 시체가 눈에 띈다. 한 병사는 길에 엎드려 있다. 다른 병사는 길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들은 부패해 있다. 전투에서 입은 듯한 외상은 확인할 수 없다. 몇몇 병사들은 숨이 끊어진채 여전히 세카이슈에 짓눌려 있었다. 세카이슈에게 휩쓸려 질식했던건가? 압사당했던건가? 하루히로는 건물 지붕위로 올라갔다. 지붕을 따라 광장을 목표로 했다. 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장에 접한 2층 옥상에서 하루히로는 일단 벽돌로 쌓은 굴뚝 뒤로 몸을 숨겼다. 호흡이 좀 흐트러졌다. 맥박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다. 하루히로는 굴뚝 그늘에서 나왔다. 상체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나아간다. 기와지붕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세카이슈로 가득차 있다, 고 할 정도는 아니다. 광장의 삼분의 일, 아니, 사분의 일 정도를 시커먼 세카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홍수가 발생하고, 겨우 진정되었다가, 점점 검은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 같기도 하다. 광장의 중앙 부근에서, 세카이슈가 칠흑의 똬리를 틀고 있다. 이곳에서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세카이슈에게 정신이 팔려서인지, 집중해서 보기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똬리위에, 뭔가 있다. 있다, 고 말해야하나? 뭐지? 하얀색 같다. 혹시, 저거 인간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체일 것이다. 인간의 시체일지 모른다. 칠흑의 똬리 위에, 인간의 시체가 서 있는건가? 누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무릎을 꿇고 있는건지 모른다. 하얗다. 저 시체는 흰 옷을 입고 있는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을 것일까? 벌거벗은 시체인건가? 아무래도 옷은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손에 뭔가 들고 있다. 둔하게 빛나는 것을. 오른손에도 왼손에도. 무기 같은 것일까? 검인지. 그리고, 방패?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서쪽 저편으로 떨어지는 듯한 태양을 가리는 구름은 없지만, 제법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다. 밤에는 한바탕 비가 올지도 모른다. 종이 낮게, 무겁게, 희미하게 울렸다. 하루히로는 동쪽 거리 바로 앞에 있는 종탑으로 시선을 돌린다. 과거 오르타나에서는, 시각을 알리기 위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두시간 간격으로 종이 울렸다. 누군가 시종을 쳤을까? 아닐 것이다. 뭔가 종에 부딪혔을까? 바람에 종이 흔들렸을까? 하루히로는 칠흑의 똬리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시체. 저것은 인간의 시체라고 생각했다. 둔하게 빛나는 검과 방패 같은 것을 가진, 전라의 시체인건 아닐까? 하고. 기묘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기묘해서 반신반의 했다. 오르타나에 살아 있는 인간은 없었다. 피난을 갔거나, 도망쳤다면 좋겠지만, 엘라이자조차 도적길드에 없었다. 원정군 병사들은 모두 죽어, 썩어 있었다. 저건 시체인건가? 백수십미터 떨어져 있다. 색깔이나 대략적인 윤곽 정도 밖에 확인할 수 없다. 세부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남자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하다.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있다. 인간, 남자. 살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시체가 검과 방패를 들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세카이슈가, 칠흑같은 똬리가, 움직이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까는 정지해 있었다. 불활성(不活性)상태였었다. 아니면, 멀어서 미세한 변화를 몰랐을 뿐일까? 어쨌든 지금은, 굽실굽실 몸을 꼬고 있다. 세카이슈는 저 시체, 인간의, 죽은 것으로 보이는 나체의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남자의 시체가 점점 세카이슈에게 포식되어 간다. 애초에, 저 시체는 어째서 칠흑의 똬리 위에 서 있었을 까? 저것이 인간의 시체라면, 스스로 의지로 세카이슈가 형성한 칠흑같은 똬리위로 기어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남자가 죽었다. 그 남자는 벌거벗은 채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우연히 어떤 순간에 남자의 시체가 세카이슈 위로 이동했다.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이 단지 시체라면. 아니라면? 세카이슈가 남자의 몸 표면에 달라붙어 간다. 세카이슈가 남자를 뒤덮으려 한다. 남자는 나체였었다. 바야흐로 깜깜한 밤, 암야(闇夜)와 같은 세카이슈를 몸에 두르고 있다. 어째서인지 세카이슈는, 남자가 손에 든 검과 방패를 뒤덮으려 하지 않는다. 저 검과 방패는 석양을 반사하고 있는건가? 해는 높지 않다. 서쪽 저편 아래로 지려하고 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빛을 띤 낮은 위치의 햇빛은 높은 남자의 몸에 닿지 않았다. 남자의 검이나 방패가 태양빛을 반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즉, 남자의 검과 방패가, 그자체가, 강렬한 것은 아니더라도,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암야(闇夜)를 두른 남자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지금까지는. 암야전(闇夜纏)이 얼굴을 든다. 죽지 않았다, 는 것일까? 시체가 아니었다? 저 남자는 살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세카이슈 때문일까? 남자의 몸 표면을 완전히 덮고 있는 암야 같은 세카이슈가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남자가, 암야전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걸까? 암야전이 밑에서 떠밀리 듯 높아진다. 그 발 아래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세카이슈가 암야전을 치켜 들어 올리고 있다. 세카이슈의 모습이 변해 간다. 암야전을 지탱해 상승시키면서, 세카슈는 뭔가 형태를 띄려 하고 있다. 세카이슈는 더이상 암야전을 떠받치는 발받침대가 아니다. 암야전을 태우고 있다. 암야전은 그위에 서 있는게 아니다. 거기에 걸터 앉아 있다.  세카이슈는, 거무스럼한 네발 짐승, 단적으로 말하면 말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흑마같은 세카이슈에, 암야전이 기승하고 있다. 하루히로는 뒷걸음질 쳤다. 뭐야. 저건 뭐야. 뭔거야, 저건? 심장의 고동이 대단하다. 하루히로는 허둥지둥 거리고 있었다. 맞아. 동요하고 있다. 저건 이상하다. 지금까지 봐왔던 세카이슈와 다르다. 확연히 다르다. 저건 뭐야. 속에 사람이 있다. 빛나는 검과 방패. 저건 뭐야? 단순한 검이 아니다. 그냥 방패가 아니다. 특별한 검이다. 특수한 방패일 것이다. 예를들면, 유물같은. 유물. 그런걸까? 저 검과 방패는 유물인걸까? 암야전이 이쪽을 향했다. 암야전을 태우고 있는 흑마가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아니, 말따위는 아니다. 목이 없다.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다리 수는 적지만, 거미같기도 하다. 그때 하루히로는, 엉거주춤한 자세보다 약간 낮은 자세로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았었다. 은형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곧바로 들키진 않을 것이다. 본디, 볼 수 있는 건가? 암야전이 시각(覺)이 있는 건지? 인간처럼 오감을 갖추고 있는지? 암야전 속에 사람 은 살아 있는건지? 역시 죽은건지? 하루히로는 깜짝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알고는 있어도 불가능하다. 그게 냉정하지 않다는 증거다. 암야전은 이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유물. 그러고보니, 시노하라는 유물의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도망치자. 왜 하루히로는 그렇게 생각했던걸까? 분명치 않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을 지 모른다. 하루히로는 뒤로 돌아봤다. 몸을 돌려 달아나기 위한 예비 동작이었다.  「……――」  그곳에 암야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같은 건물 지붕위다. 랄까, 굴뚝이다. 굴뚝 위에 암야전이 서 있다. 광장의 암야전과는 다르다. 번쩍이는 금빛 몸통 갑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또 다른 암야전 이었다. 하루히로는 달렸다. 암야전은 굴뚝에서 뛰어 내리지는 않았다. 날았다.  부상(浮上)한 것이다. 암야전은 소리도 없이 떠올랐다. 하루히로는 그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눈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정말 뭐냐? 고 생각하면서도, 기울어진 기와 지붕위를 계속 달렸다. 하루히로는 옆건물 지붕위로 뛰어 건너진 않았다. 지붕과 지붕사이로 뛰어 든다. 요컨데 뛰어내렸다. 낙하하면서 옆 건물의 외벽을 찼다. 곧바로 몸을 반전시켜, 이쪽 건물 외벽에 움푹들어간 곳에 손가락을 건다. 손목에 격통이 찾아왔다. 아파서 놓아버린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놓고 골목길에 착지했다. 올려다보니, 지붕과 지붕사이 하늘에 암야전의 모습은 없었다. 하루히로는 한명정도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달려 거리로 빠져 나왔다. 암야전은 그 거리 상공에 있었다. 그곳에서 하루히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암야전이 지팡이 끝을 하루히로에게로 향하게 했다. 저것은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다. 저 갑옷도, 왕관도. 가까스로 하루히로도 알아챘다. 유물이다. 암야전은 유물을 들고 있다. 말하자면, 유물술사(遺物使)세카이슈 인간 인 것이다. 하루히로는 달렸다. 암야전의 지팡이가 번개같은 빛을 방출했다. ‘피하자’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지팡이도 틀림없이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유물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우선은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 수는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빛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숨을 헐떡이며 그 골목길을 달려 밖으로 나가자, 다시 상공에 암야전이 떠 있었다. 왓……」 하루히로는 골목으로 되돌아 왔다. 지팡이다. 지팡이의 빛이 덮쳐온다. 빛이 번쩍 빛나며 건물 외벽을 팍 깎아 냈다. 석재가 불에 탄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 맞으면 좋지 않다.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앞쪽 오른쪽 건물에 작은 창문이 나있었다. 널빤지를 당겨 뜯어내고, 무리하게 작은 창문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취사장 같은 방이었다. 여기에 숨어있고 싶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암야전이 이 건물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취사장을 나오자 복도였다. 계단이 있었다. 하루히로는 계단을 뛰어올라, 2층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옆 단층 건물의 지붕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뛰어 단층 건물 지붕으로 건너간다. 이어 다른 건물 지붕으로 뛰어 이동하고, 뛰면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암야전은? 어디? 어디있지? 암흑거미 를 탄 암야전은? 아직 광장에? 하루히로를 쫓고 있는지? 찾고 있는지? 지팡이를 든 암야전은? 알 수 없다. 본 범위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있다. 아마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하루히로는 어느새 남구에 들어서 있었다. 암야전이 눈에 띄지 않는다. 거리로 내려가자, 길가에서 세카이슈가 몸을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날뛰며 돌아다니 듯 몸부림 치고 있다. 하루히로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는 없다. 전방에 사람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사람 그림자. 검다. 사람 그림자? 검은, 사람 형태의? 뭐지, 저건? 하루히로는 길 모통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면 저 검은 사람 형태의 뭔가쪽으로 향해가게 된다. 그건 좋지 않을 것 같다. 돌아들어간 곳에서도 세카이슈가 날 뛰고 있었다. 여러개의 관모양의 세카이슈가 획획 크게 꿈틀거리고 있다. 길의 폭은 2미터도 안된다. 관모양의 세카이슈가 채찍처럼 땅이나 건물을 때리고 있다. 그때마다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한다.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다. 하루히로는 관 모양의 세카이슈가 20, 30센티 정도 낮게 위치했을 때를 가늠해 뛰어 넘어려 했다. 왼발이 걸렸다. 「……큭――!」 그 순간, 하루히로의 왼발과 부딪힌, 세카이슈의 부위가 파열되었다. 아 아니, 다르다. 파열된 게 아니다. 급격하게 팽창하여, 그곳에서 사람형태의 뭔가 튀어나왔다. 세카이슈로부터 태어났다. 세카이슈 인간이다. 하루히로는 앞으로 푹 꼬꾸라질 뻔 했다. 세카이슈 인간이 덮쳐온다. 인간, 사람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머리가 없다. 하루히로는 순간적으로 세카이슈 인간을 걷어 차 떨어뜨리고, 뛴다. 관 모양의 세카이슈는 점점 더 맹위를 떨친다. 세카이슈 인간이 쫓아온다. 뒷 쪽에서 쑤욱쑤욱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난다. 하루히로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관모양의 세카이슈를 피해 전진하는 것만으로 벅차다. 어떻게든 넓은 거리로 나오자, 왼쪽에 의용병단 사무소가 보였다. 예전에 내걸려 있었던 흰 바탕에 붉은 초승달 깃발은 없다. 오르타나 변경군 의용병단 레드문, 이라고 크게 적힌 간판은 남아 있다. 하루히로는 의용병단 사무소 쪽으로 달려갔다. 그 주변에 관 모양 세카이슈가 꿈틀거리고 있다. 잠깐, 뒤돌아 보니, 있었다. 세카이슈 인간이. 한명이 아니다. 늘었다. 많이 있다. 하루히로를 쫓아온다. 머리위에서 뭔가 빛이 번쩍여, 하루히로는 옆으로 도약했다. 암야전의 지팡이다. 쿠쿵하고 지면이 타올랐다. 굴러 일러나려는 하루히로의 시선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세카이슈 인간만이 아니다. 쫓아오는 것들 중에는, 놈도 있었다. 빛나는 검과 방패를 들고 암흑거미에 걸터 앉은 암야전이. 여기에 더해, 저녁 하늘에 떠 있는 지팡이를 든 암야전의 모습도 보였다. 그 암야전은 지팡이를 이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다시 그 섬광이 방출된다. 하루히로는 의용병단 사무소 앞을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의용병단 사무소와 그 옆건물 사이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지? 사람인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정말로, 사람이다. 머리카락이 길다. 목도리로 얼굴 아래 반을 가리고 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단지 손짓했다. 암야전의 지팡이가 예의 빛을 발한 것과, 아마 동시 였을 것이다. 하루히로는 의용병단 사무소와 옆 건물 사이로 들어 갔다. 좁다. 몸을 옆으로 틀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  그녀는 앞쪽에서 나아가고 있다.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가 없어졌다. 「어엇……!?」 세카이슈 인간들도 그 건물 틈으로 점점 들어오고 있다. 하루히로는 패닉이 될 듯 하면서도 그녀가 사라진 근처까지 전진한다. 구멍이다. 건물 외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아니, 일단, 출입구인가? 작다. 쪼그려 앉아도 들어갈 수 있을지 말지. 헤매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루히로는 기어서 그 작은 출입구를 그럭저럭 빠져 나갔다. 거의 깜깜하고, 곰팡이 냄새가 난다. 의용병단 사무소 안쪽 인 듯 하지만, 이 방은 모른다. 들어와본 적이 없다. 「와, 이리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서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나아가자,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왼팔이 잡혀 끌려 갔다. 하루히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연 듯 하다. 그 앞도 어두웠다. 방이나 통로를 조금 나아가다 다시 문을 열었다. 그녀는 하루히로의 팔을 놓았다. 뭔가 하고 있다. 아무래도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고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히로가 도와줄 것도 없이, 그녀는 그것을 당겨 들어 올렸다. 눈이 익숙해졌다. 지하인가? 바닥에 세로로 뚫린 구멍이 있다. 그곳에 뚜껑이 씌워져 있다. 그녀는 그 뚜껑을 열었던 것이다. 「먼저 내려가」 그녀에게 명령받기 전에, 하루히로는 그 세로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쇠로 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불빛은 전혀 없다. 사다리를 몇계단 내려간 것 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게의치 않고 하루히로는 계속 내려갔다. 위에서 뚜껑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괜찮다. 그녀도 내려온다. 내려갈 수 있을 때 까지 사다리를 내려가자, 그곳은 습했고, 뭐라 말 할 수 없는 악취가 가득했다. 사다리에 매달려 있으면, 내려오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고 만다. 그런 생각에 하루히로는 사다리에서 떨어졌지만, 더이상,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내려왔다. 그녀는 다시 하루히로의 왼팔을 잡았다. 오른팔도 잡았다.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마주보고 있다. 그녀는 목도리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숨결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온기뿐이다. 어둠을 통해 그녀의 체온이 살짝 전해져 온다. 「무사(無事)?」 「네, 어떻게든」 하루히로가 한숨을 쉬었다. 도적 길드에 없었다. 대피했을 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더 나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을 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에라이자씨도. 무사해, 다행이에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 하다. 살아 있었다. 살아 있어 주었다. 그녀는 도적길드의 선배로, 왠지 맨얼굴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조언자(멘토)다. 친한 사이는 아니다. 솔직히 잘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매우 소중한 지인 중 한명이다. 하루히로의 왼쪽 어깨 부근에 뭔가 닿았다. 잠시 후, 그것이 그녀의 이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히로의 양팔을 잡은 그녀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하루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고개를 끄떡일 수 밖에 없었다. 저자후기 이 소설을 쓸 때, 연표 같은 걸 만들어 왔습니다. 손에 든 연표에는, 몇년 몇월 며칠에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한다, 는 식으로 대략 모든 사건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주인공 하루히로와 관련된 일들을 주로 써왔지만, 종반에 접어들면서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루히로와 그 주변으로 좁혀 묘사하는 방법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야기가 끝난 뒤에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버릴 것 같아서, 본권은 다르게 쓰는 방법을 채용했습니다. 그렇다해도, 끝을 향해, 가능한 하루히로를 중심으로 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끝낼 마음이 가득하지만, 끝날 것 같은데 좀처럼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좀 더 손이 갈 것 같은 분위기 입니다. - 주몬지 아오 -


댓글 2개:

  1. 작가후기를 보니, 쓸 내용이 많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진작에 더스크렐름, 다룽갈, 파라노이니 이세계속에 이세계 이야기는 빼고,
    그림갈에 집중해서 쓰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쨋거나 이로서 19권 번역도 마쳤네요. 편집되는대로 PDF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간 읽어주시고 특히 리뷰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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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번역 감사합니다.
    빨리 정발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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