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일요일

재와 환상의 그림갈 19권 9장

0117A660 終曲よ,鳴り響け(피날레여, 울려퍼져라) 수백, 수천대의 칠흑의 마차가 대지를 짓밟아, 사라지지 않는 거무스름한 바퀴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풍조황야의 너무나 강렬한 햇빛과 제멋대로 휘몰아치는 바람을 견뎌내 온 초목은 세카이슈의 침략에도 어디까지나 무관심을 관철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들짐승들은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하루히로들은 멀리 달려가는 짐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빈번하지는 않다. 기껏해야 하루에 한두번이다. 새가 거의 없다. 풍조황야에 발을 디딘 지 벌써 6일째지만, 하루히로와 란타는 하늘을 나는 새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시력이 좋은 유메나 이츠쿠시마는 가끔 새가 있다고 가리킨다. 희귀하기 때문이다. 둥그스름하고 꼬리가 있는 티모, 다리가 긴 토끼같은 빼비라는, 풍조황야뿐 아니라 그림갈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극히 흔한 작은 동물조차, 꽤 찾기 어렵다. 이츠쿠시마의 말을 빌리자면, 도마뱀이나 뱀같은 것도 극단적으로 적어졌다고 한다. 약 한달 전, 철혈왕국을 목표로 풍조황야를 북상했다. 그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전혀 다른 세계다. 지금, 하루히로들은 변해버린 풍조황야를 남하하고 있다. 검은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퍼져있는 세카이슈를 피할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하루히로들은, 종종 세카이슈를 넘어 전진한다. 뛰어넘기도 했다. 제법 폭이 넓은 띠, 혹은 용의 목처럼 굵은 관(管)으로 변해 있는 세카이슈에 앞길이 막혔을 경우에는, 만약을 위해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세카이슈에 물리적인 자극을 줘도 반격을 당하지는 않을 듯 하지만, 위험이 전혀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키이슈는, 단지 그곳에 있을 뿐인 정물(靜物)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몸을 비트는 세카이슈를 만나기도 했다. 하루히로들은 띠모양의 세카이슈가 서로 결합하면서 더 굵은 세카이슈가 되어가는 장면을 몇번이나 관찰했었다. 세카이슈에 반쯤 파묻혀 숨이 끊긴 짐승의 시체 등도 여기저기 발견되었다. 가급적 세카이슈에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다. 문제는, 세카이슈는 어디나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세카이슈는 땅 아래에서 스며 나오듯 생겨나,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보드평야에서 본 세카이슈는 동쪽으로, 아마도 흑금연산으로, 철혈왕국쪽으로 뻗어 있었다. 다만, 모든 세카이슈가 철혈왕국을 지향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세카이슈도 있는 것 같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세카이슈도 있는 것 같다.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세카이슈는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하루히로들의 진행방향에 관산이 솟아 있다. 어느 각도에서나 산줄기의 모양이 대략 왕관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모양이다. 관산에서 남쪽으로 대략 150KM, 서쪽으로 100KM정도 가면 오르타나가 있다. 분명히, 하루히로들은 오르타나로 향하고 있다. 하루히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확실히는 모른다. 아니, 역시 오르타나다. 당장은 오르타나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몇번인가 이야기를 나누어 그렇게 결정했을 터다. 열은 내렸다. 양손의 상처는 아직 아프다.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말해봐야 소용없다. 통증이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입을 열고 싶지 않다. 형편 좋게도, 이츠쿠시마와 유메는 주위를 경계하는 것과 가는 길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란타 역시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있다. 늑대개 포치는 불필요하게 짖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 이야기해도, 하루히로는 잠자코 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유메가 자주 말을 걸어 왔지만, 그때마다 하루히로가, 그저 괜찮다고 대답하자, 그마저도 없어졌다. 그 전후에, 란타가 내버려두라고 유메에게 말했다. 란타에게 감사따위는 하지 않지만, 그말대로다.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부담이다. 고통스럽다든지, 괴롭다든지, 슬프다든지, 종류는 상관없이, 어떠한 감정도 하루히로에게 무겁게 와 닿는다. 뭐든, 어떻게든 해야 된다. 그것은 알고 있지만, 무엇을 해도 무의미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계속 걸어도,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목적지? 애초에, 그런게 있었던가? 목적? 목표? 어떤 전망? 방향성? 경로? 몸을 향하고 있는 방향이 앞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 정도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다. 하루히로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이 무리라면, 반 걸음이라도 앞으로. 속 그렇게 해왔다. 나름대로 걸음을 옮겨나갈 작정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이 꼬락서니다. 하루히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어떤 상황아래 옳은 판단을 내리려 한다. 틀리고 싶지 않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으면 이익을 내고 싶다. 이득은 없어도 손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상처받지 않을 수 없고, 어떻게 해도 뭔가를 잃게 된다면, 적어도 최소한으로 끝내고 싶다.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심히 했어. 잘했어’ 라고 생각하고 싶다. 전부 헛수고였던 것이다. 하루히로는 결국 삽질을 하고 있었던 셈이 아닐까? 땅을 조금씩 파고, 파고, 파고, 계속 파고, 구덩이 옆에 흙을 쌓았다. 땀투성이로 자신이 판 구멍을 내려다보거나, 흙더미를 바라 보면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처음보다 어느정도는 삽질이 잘 되는 것 같고, 흙더미는 많이 커져 있다. ‘뭐야. 대단하잖아. 하면 되는거야’ 그래서? 이 구덩이는? 무엇을 위한 구덩이인가? 그냥 구덩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구덩이를 판 것 뿐? 구덩이를 팠다? 단지 그뿐? 누군가에게 상담하면 ‘아니, 그렇지는 않다’ 라고 위로해줄 지 모른다. 그림갈에서 눈을 뜨고 오늘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 않은가? 만남이 있었다. 이별도 있었다. 많은 경치를 보았다. 자신의 힘으로, 동료들과 힘을 합쳐, 이룬 것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그 순간 순간은 무수한 색으로 물들여져 빛나고 있었을 터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그저 구덩이를 파온 것과는 다르다. 결코 헛수고 따위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해도, 과정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친다면, 어차피 누구나 죽으니 사는게 의미가 없고, 태어난 것 자체가 완전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런 것이다, 고 하루히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의미란 그곳에 있는게 아니다. 찾아내는 것이다. 설령 하루히로가 삽질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도, 그 행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무의미하지는 않다. 구덩이를 파는 게,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날들도 확실히 있었다. 그때의 하루히로는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 냈었다. 지금, 공허할 뿐이다. 아니, 기쁘게 구덩이를 파던 기억이, 쓸데없이 하루히로를 괴롭히고 있다. 이럴 바에는, 구덩이 따위 파지 말았음 좋았다. 이렇게 잃을 거라면,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시간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마나토 때도, 모구조 때도, 그랬었지 않은가? 당분간은 참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까지 견디면 돼? 안되는 거야? 그냥 끝내면 안되는 거야? 누가 금지 하고 있어? 미안해. 유메랑 란타에게 사죄할까? 미안. 이제 무리인가봐. 무책임하다 생각해. 여기서 탈락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아직 두명이나 남아 있는데. 달아나는 것 같아 비겁하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란타에게는 유메가 있고, 유메에게는 란타가 있지. 유메에게는 이츠쿠시마와 포치도 있잖아. 난? 나에게는? 뭐가 있어? 알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유메와 란타가, 얼마나―― 얼마나. 그래도, 그 때문에, 나.  너희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힘내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도망가면, 안될까? 별일은 아니겠지? 특별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날 내버려 두면 돼. 방치해두면 돼. 나, 딱히 아무짓도 안해. 그냥 여기 있기만 할꺼야. 앉아 있다. 그러다 눕겠지. 일단, 누우면, 아마 안 일어날꺼야. 분명 일어날 수 없어. 됐어, 그걸로. 너에게는 그것이 어울려. 끝내고 싶은거야. 끝내고 싶어. 끝내자. 끝내. 끝낼게. 끝내도 되겠지? 끝날뿐이야. 그냥 끝날뿐 인거야.  끝은 가까워. 굉장히 가까워. 그러니까, 끝내자. 아무도 불평하지 말아줘. 어차피 끝나는 거야. 모두 끝나. 이것이든 저것이든 다 끝나. 시작할 때 부터 끝나는게 정해져 있었어. 시작되었을 때 이미 계속 끝나가고 있었어. 이제 끝날 뿐이야. 끝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세카이슈에 갈라진 풍조황야는 아무리 봐다 종말적이다. 이손으로 막을 내릴 것도 없이, 모든게 끝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끝나는거야. 끝난다. 끝내자.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되겠지? 누구에게도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지? 허락 따윈 필요 없다. 끝날 뿐이야. 그냥 끝내는 거야. 어느새 늑대개가 옆을 나란히 걷는 듯 보였다. 기분 탓인가 생각되었다. 우연인가 싶었지만, 포치는 몸통을 문지르 듯 따라온다. 저쪽으로 가. 떨어져 있어 줘. 끝내고 싶은거야. 끝내려고 할뿐인거야. 그만해줘. 끝내고 싶은데, 방해하지 말아줘. 가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거나 하지 말아줘. 유메도 그만 좀 해줘. 쉬고 있을 때 어깨를 기대거나 하지 말아줘. 옛날 이야기 같은거 하지 말아줘. 란타도 그만해.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웃거나 하지 말아줘. 이츠쿠시마가 하늘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며 서있었다. 「나는, 살아있다구」 「그 뭔소리래」 란타가 웃었다. 유메가 펄쩍 뛰며 외친다. 「응냐아아아! 유메도 말이지엣! 살아 있다꼬에에에에에에……!」 「켓! 나도 그렇단 거야……!」 란타가 ‘질까보냐’ 하고 고함친다. 「이몸은 살아계신다는 거야아아아아아……! 어떻냐 이 빌어먹을 것들아아아아아아아……!」 그만해줘. 끝내고 싶은거야. 끝내려는 거야. 끝내고 싶은데, 어째서 끝내지 못하고 있는거야. 자신이 무엇에 매달리고 있는지. 매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간단한 일인데. 그냥 끝내면 된다. 그러면, 끝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모든게 없어진다. 그거면 돼. 없어져 버려. 후회도, 원하는것도, 아무것도 필요없어. 어째서 끝내지 못하는 걸까? 무엇이 끌어당기며 막고 있는걸까? 무섭지 않은데.  여기에 이르러 무서울 리가 없다. 아쉬움도 없다. 여한이란 아무것도 없다. 있다해도, 끝내고 싶다. 끝내는 쪽이 쉽다. 아침이 온다. 또다시 아침이 오고야 만다. 세카이슈로 갈라진 대지 끝에 아침해가 떠오른다. 무릎을 껴안고 지평선 너머로 얼굴을 내민 태양에게 이별을 고하고 싶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번에야말로, 안녕. 약속할게. 다음은 없어. 그러니까, 가르쳐 주면 좋겠어. 그렇게 매일 매일 질리지 않고 내리쬐면, 허무하지 않는건지? 이렇게 쓸모없는 몸을 따뜻하게 해줘봤자 무엇하나 갚을 수 없어. 더이상 보상받을 수 없는 일, 반복하는 거 그만 두려고 생각하지 않은거야? 늑대개가 차갑게 젖은 콧등을 들이민다. 얼굴을 핥는다. 늑대개는 뭐든 알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하고 중얼거려 본다. 「가자, 멍청이」 란타에게 머리를 맞았다. 「앗! 그런 짓 하면 안된다 카이!」 유메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하자, 란타는 생생한 상처자국이 눈에 띄는 얼굴을 허풍스럽게 일그러 뜨리며 아랫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적당히 힘조절하고 있다고! 뭔가 커뮤니케이션 범주에 속하겠지. 일일이 씨끄럽게 굴면, 뽀뽀 해버리겠어 이녀석」 「뽀뽀 말이데이, 유메 아무것도 안했는데 요전에 갑자기 당했다 아이가!」 「뭣!」 「우오오오오오 ー이이이잇!? 아아아아아 아재 , 얼굴 벌겋게하고 화살 겨누지 마! 근데, 빨라! 활들고 화살메기는 게 넘 순식간! 아아아 아녀, 오오, 오해야!유메가 빠루삐로만 좀 이렇게, 뭐랄까, 모르는건 아니지만, 나도 있잖아 봐ー!? 하는 부분은 듬뿍 표현한다든가 말이지ー적인 !? 아아아아 아재도 남자라면 이 뉘앙스는 전해지겠지!?」 「알까보냐」 「그그그 그러니까 활 아슬아슬하게 당기는 것은……!」 「이제 란타는 뽀뽀 금지 라꼬!」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ーーーー!? 진짜아아아아!? 계속!? 영원히이이!? 뽀뽀!? 정말!? 제정신이냐 너!? 너도 싫지는 않았던거ー아냐!?」 「깜짝 놀랐다카이. 싫다든가 한건 아니지만, 갑자기 했다아이가?」 「봐ー?싫지는 않았던 거잖! 봐아아아아아아아ー……!」 「유, 유메…… 」 「아재 침울해졌! 다 큰 아재가 무릎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 첨 봤어! 유감이었습니다!」 「스승님, 와 그카노? 괜찮아예?」 「괜찮다! 괜찮다니까, 유메! 지금, 너에게 위로 받으면 더 괴로울 뿐이라니까!」 「느우! 그런기라예?」 끝내도 되지 않을까 하고 하루히로는 생각한다. 나는 모두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내가 없어도, 모두는 걸어간다. 나는 걸을 수 없다. 더이상 걷고 싶지 않다니까. 말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잠자코 따라간다. 이판사판이다. 될대로 되라. 걸으면 되잖아. 걷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관(管)과 검은 관, 세카이슈와 세카이슈 사이를 걸어간다. 「――야 빌어먹을!」 란타가 땅을 걷어차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앞쪽에 세카이슈와 세카이슈가 그물망 처럼 되어 있다. 세카이슈를 밟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란타가, 이츠쿠시마가, 유메가, 뒤돌아 보고, 가만히 서 있는 하루히로를 포치가 올려다 본다. 하루히로는 걷기 시작한다. 「어이…… 」 란타가 불러 세운다. 하루히로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걷는다. 세카이슈를 짓밟지는 않았다. 그냥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와서 뭘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두려움 따위는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음 좋았었다. 끝내자. 끝내는 것으로 하자. 끝내고 싶다. 맞다. 하루히로는 끝을 향해 걷고 있다. 나아가는 방향에 있는 것은 끝이다. 어떤식으로 끝날 것인가? 무엇이 끝나도록 만들 것인가? 그건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머지 않아 끝난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하루히로는 멀리 우뚝 솟은 관산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앞으로 앞으로 내디뎠다. 발아래가 흙이든, 풀이든, 세카이슈든 신경쓰이지 않는다. 뭐든 다 똑 같다. 란타나 유메, 이츠쿠시마들이 쫓아 온다. 다들 어떻게 하고 있는걸까? 세카이슈를 밟고 있을까 알고싶은 건 아니다. 포치는 가끔 하루히로 앞에 나타난다. 시야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관산에 가까워질 수록, 세카이슈가 세력을 넓혀 간다. 세카이슈가 둘러친 그물의 눈이 가늘고, 촘촘해진다. 지표면은 세카이슈에 의해 남김없이 뒤덮혀져 있는 것 같다. 세카이슈가 지상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다. 눈을 태울 듯한 서쪽으로 지는 해도 세카이슈를 비추는 일은 없다. 세카이슈에게는 광택이라는고는 일절 없다. 세카이슈의 검은색은 어둠보다 어둡다. 그 암흑은 어디까지라도 바닥없이 깊다. 하루히로는 세카이슈 위에 서있다. 적어도, 하루히로 앞에는 세카이슈와 노을 진 하늘밖에 없다. 관산인줄 알았었다. 어느쪽에서 보더라도 왕관 모양의 산줄기라고. 아니, 저것은 관산이다. 관산도 세카이슈에게 뒤덮여 있었다. 먼거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관산의 기슭이나 중턱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 세카이슈 일까? 세카이슈 집합체가 융기하든지 어떻게 해서, 저런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왜 하루히로는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저것 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히로는 풍조황야에서 몇번이나 저것을 목격했었다. 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매달리기 까지 했었다. 「거인…… 」 세장거인이다. 사람의 지혜가 미치는 범주가 아닌, 저 가늘고 긴 윤곽이 특징적인 거인들은, 풍조황야를 자유로이 느긋하고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너무 거대해 올려다봐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바로 자기 세상인양 했다. 터무니 없는 천재지변으로 풍조황야의 지형이 변화했다해도, 세장거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오크들이 멸망한 후에도, 세장거인들은 유유히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생물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하고, 하루히로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있었다. 그 세장거인이 세카이슈에게 사로잡혀 있다. 딱 봐도, 관산자락에 둘, 중턱에 하나, 더 위쪽, 산정상 부근에도 세장거인같은 모습이 하나 확인된다. 서있는 세장거인은 일단 그것뿐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루히로의 수백미터 앞쪽에서 몸부림치 듯 움직이고 잇는 것도 세장거인 아닐까? 이것이든 저것이든 새까맣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렵지만, 검은 지면에서 검은 세장거인 상반신이 돋아나  있는 것 같다. 그곳은 움푹 들어가 있어, 세장거인이 떨어지려고 하는건지 모른다. 개미지옥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관산자락에 세장거인이 빠져 들어가 버릴 정도로 큰 구멍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카이슈는 땅 밑바닥에서 생겨난다. 어쩌면, 그 구멍에서 세카이슈가 발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구멍이 있었던 것일까? 하루히로는 알 수 없다. 본 적은 없다. 이츠쿠시마에게 들은 기억도 없다. 보드평야 계곡 밑바닥에서도 세카이슈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일대의 세카이슈는 관산의 바닥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는 관산 자체가 세카이슈로 변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실제,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장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갈 속(中)에서 세카이슈가 발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카이슈가 그림갈을 뒤덮어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세카이슈라는, 그림갈이 걸린, 저항하기 어렵고, 치명적인, 치유 불가능한 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갈은 죽으려고 하는지 모른다. 알 수 없다. 하루히로는 모른다. 알리가 없다. 끝내지 않아도 끝나려고 하는지 모른다. 머지않아 모든 것이 끝나버릴지 모른다. 이것이 진짜 끝일지도 모른다.

댓글 1개:

  1. 18권 하루히로에 자극받았는지, 란타가 유메에 대해 진도 뺐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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